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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뉴스·생활

칼 라거펠트👠, 한 줌의 재가 되어...

샤넬 (Chanel)을 대표하는 칼 라거펠트 (Karl Lagerfeld)에겐 많은 수식어가 따르며 이는 패션계에 대한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대변해 왔다.
'패션의 제왕', ''패션의 황제', '패션계의 거장', ''카이저 (독어:황제/ 제왕)', '샤넬의 아이콘', '샤넬의 전설', '패션의 아이콘' 등…
칼 라거펠트는 뒤따르는 많은 수식어만큼 다양한 방면에 수많은 재능을 펼친 다재다능한 천재로 일컬어진다.

타계한 '패션의 제왕' 칼 라거펠트는 지난 2월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췌장암으로 밝혀졌으며, 고인의 유지에 따라 장례식 없이 조촐하게 화장 절차를 밟았다.




독일 출신인 칼 라거펠트는 샤넬과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개인 브랜드 칼 라거펠트를 운영해왔다.
패션디자이너로서 그 자신이 패션의 아이콘이자, 브랜드였고, 모델이었으며, 사진작가인 동시에 예술감독 (샤넬을 테마로 한 단편영화, 광고 캠페인, 다채로운 패션쇼 무대연출)으로 파격적 컨셉트로 재능을 보여, 라거펠트는 패션을 전공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졌지만, 뛰어난 일러스트레이터 (정작 그는 그림그리는 걸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고 한다)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였기에 세인들이 천재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라거펠트는 항상 흰머리를 올백의 포니테일로 깔끔히 정리하고, 검은 선글라스에 손가락이 없는 검은 가죽장갑, 그리고 목을 가리는 흰색의 하이칼라 셔츠를 빼놓고는 그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가죽장갑을 끼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손가락이 없는 장갑을 착용했고, 테일러 메이드 셔츠에 대한 경의를 드러내기 위해 수트를 즐겨 입었다. 물론 집에서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장갑은 팔을 길어 보이게 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하기도 했고, 어릴 때 위스키가 들은 양주잔이 눈에 쏟아질 뻔한 걸 안경이 막아주어 성인이 되어 선글라스를 쓴다고도 했다.
이렇듯 올백의 포니테일, 검은 선글라스, 흰색 하이칼라에 손가락이 없는 가죽장갑을 즐겨 착용하던 그의 스타일은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다재다능한 크리에이터답게 칼 라거펠트는 끊임없는 영감을 필요로 했다. 그 원천으로 책을 빼놓지 않았는데 개인 서재를 넘어,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그의 서고에는 약 23만 여권의 책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파리 7구 한 서점의 장서 7만 여권을 소장하기 위해 통째로 샀을 정도로 수년간 파리의 큰 서점들의 가장 큰 고객이었다.  

하지만 천재적인 창안자로서 예민하고 까칠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엄격한 의상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는 그의 패션 업적, 명성, 재능, 재산, 스타일 뿐 아니라 그의 색이 잘 드러나는 직설적이고 뾰족한 화법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어록들을 모은『칼 라거펠트, 금기의 어록』이란 책이 2014년 국내에서도 출판되기까지 했다.
칼 라거펠트의 진솔한 화법·어록이야말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그니처 브랜드보다 더 그의 삶에 대한 태도나 세상을 보는 관점 등에서 이 천재의 삶과 철학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하겠다.

“인생은 한 번 뿐. 그러니 어린 시절은 재밌게 보내야 한다. 그래서 난 제 멋대로 살았다.”

“뭐든 즉흥적으로 해라. 더 창조적으로 생각해라. 무엇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여라.”

샤넬과 칼 라거펠트 스스로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린 기회였던 1983년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로 입사한 이후 그는 “내 소명은, 샤넬 재킷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올드한 이미지에 가까웠던 샤넬을 젊은층까지 사로잡게 만들었다. 세간에 ‘죽은 샤넬을 부활시켰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였다.

“옷이 당신한테 어울리는지 고민하기 전에 당신이 그 옷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먼저 고민하라.” 

“난 숨 쉬듯 디자인한다. 다른 걸 생각하거나 어딘가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패션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기차와도 같다. 얼른 탑승하지 않으면 떠난다.”

"당신이 조깅 바지를 입는다면, 삶의 통제를 완전히 잃은 것과 다름없다."

“나는 살아 있는 상표다. 내 이름은 라벨펠트(LABELFELD). 라거펠트가 아니다.” 

“샤넬을 숭배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나는 샤넬이 아니다.”   

"다이어트란 당신이 잃어야 이기는 유일한 게임이다."

"나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단지 이 현실이 나와는 맞지 않을 뿐.."

"일에서는 나한테 치매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난 이게 굉장히 좋다. 요즘 너무 많은 사람이 자신이 뭘 어떻게 했는지 다 기억한다 -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필요하다."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물건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다. 오래된 중고차가 필요할 때, 사람들은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패션 아이템이 필요하다면,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허망함은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것이다."

"나 자신이 날 표현한 캐리커처 같다. 그리고 난 그게 좋다. 베네치아 카니발을 일년 내 즐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 희생하면 안 된다. 계속 주기만 한다면 나중에는 더는 줄 수 있는 것이 없게 되고, 그럼 다른 이들이 자신을 돌봐주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모든 것이 패션에 영향을 미친다. 패션에서 가장 일찍 드러난다. 패션은 우리 삶과 우리의 시대를 가장 짧은 시간에 대변해준다. 차, 디자인, 그리고 건축도 이걸 깨우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는 “책은 오남용의 여지가 없는 마약과도 같다.”라고 언급했으며, 파리 7구에 7L이라는 서점을 낼만큼 서적에 애착을 드러낸 걸로도 유명한데, 그의 컬렉션 대부분은 예술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독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럭셔리한 것.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인생의 럭셔리.” 
  
“단지 알고 싶어서 읽는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책을 살 때마다 그 책을 읽을 시간 또한 사는 거라고..”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놓고, 그 속에서 책과 함께 하는 기쁨은 나를 언제나 편안하게 한다.” 
  
“내가 책을 사들이는 건 불치병과도 같다. 영원히 낫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방에 책이 없다면, 그 공간은 죽은 것과 다름 없다.” 
  
“내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유일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 한 번 가버리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고인이 된 ‘패션 황제’ 칼 라거펠트의 애묘 ‘슈페트’. 최근 2억 달러 (약 2,245억원)에 이르는 칼의 일부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백만장자 고양이가 된 슈페트에 대한 관심이 들끓고 있다. 생전 인터뷰에서 라거펠트는 슈페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지만 버르장머리는 없죠.” 그래서일까? 칼은 슈페트를 일컬어 고상한 샤넬 레이디보다는 진 할로우에 가깝다고 말한다. 1930년대 최고 미인으로 꼽히는 진 할로우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팜므 파탈’의 원조. 그렇다고 마냥 앙칼지기만 한 건 아니다. 어떨 땐 창피할 정도로 응석받이라니, ‘밀당’의 고수가 따로 없다.

칼 라거펠트는 한 인터뷰에서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슈페트와 결혼하고 싶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에서는 고양이에게 유산을 남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다.' 라고 말하며 유산 상속에 대한 뜻을 밝힌 바 있다.

지난 2015년 공영 프랑스TV와의 인터뷰에서도 칼 라거펠트는 "슈페트가 먼저 죽었다면 내가 죽은 뒤 화장해서 모친과 슈페트와 함께 뿌려달라."며 "나는 그냥 야생의 숲속의 동물들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다. 무덤에 남아 사람들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은 질색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의 집에서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슈페트는 늘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난 장례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내 장례식에 오지 않았으면 한다. 내 유골로 뭘 하든 상관없다. 그냥 쓰레기 더미에 내다 던져도 좋다.”

칼 라거펠트는 지난 2017년 12월 프랑스의 록스타 가수 조니 할리데이 (향년 74세)가 별세했을 때에도 언론 인터뷰에서 "할리데이처럼 성대한 장례식도 원하지 않는다."면서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할리데이의 가족들이 유언을 두고 싸움박질을 하는 걸 보니 장례식이 코미디처럼 느껴진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커리어 최정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말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라거펠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만큼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앞두고 있었다.

"과거는 그저 이상일 뿐이다. 과거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죽게 된다.” 

"왜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어차피 내가 죽을 때 모두 끝날 것을.."

"나에게 일이란 평온하고, 침착하며, 질서정연한 것이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은 질색이다."

“나는 휴가가 싫다. 그건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만 죽어라 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나? 나는 밀라노와 파리, 뉴욕을 종횡무진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주도로 하루 20시간씩 일한다. 진정한 '프로'가 바로 나다.”

"난 할 말이 없다. 솔직히 내가 기억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해야 할 일-지난 일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 내가 하는 일-이미 한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내가 한 일-무엇을 했는가 잊는 것. 이미 끝난 일은 끝이다.” 

"나는 normal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 자서전? 글이 쓸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사는 것이 바로 자서전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내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 할 뿐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추구하는 바를 위해 돈을 쓰면서 살 줄 알아야 한다... 럭셔리, 그것은 일종의 규범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을 살라. 그것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럭셔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