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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 르누아르 부자의 회화와 영화




‘르누아르 아버지와 아들, 회화와 영화 (Renoir père et fils, peinture et cinéma)’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서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 특수한 표현을 보였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던 프랑스 인상파 화가인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년)와 그의 아들로 프랑스 영화의 개척자로서 1975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작가로 평가받은 최초의 영화 감독 중 한 명이었던 영화제작자 쟝 르누아르(1894-1979년)로 이어지는 르누아르 부자의 2세대 가족사 전시회 ‘르누아르 아버지와 아들, 회화와 영화 (Renoir père et fils, peinture et cinéma)’전이 오르세미술관에서 1월 27일까지 전시되고 있다. 쟝 르누아르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예술적 유산과 그 영향력을 분석하는데 나의 인생을 바쳤다”고 말년에 회고했다. 


르누아르 부자의 회화 및 영화 (오르세미술관)



이러한 관점에서 회화와 영화의 시공을 초월한 만남, ‘르누아르, 부자전’이 열리며 아버지 르누아르의 화폭 60점이 소개된다. 주로 둘째 아들 쟝과 관련된 화폭들이다. 쟝 르누아르는 1895년 유아기 때부터 아버지가 선호하는 모델이 되었고, 1910년 사냥꾼 차림으로 마지막 포즈를 취했다. 그는 이 10대 미소년 초상화를 아버지의 유품으로 평생 간직했다. 

화가 르누아르는 세 아들을 소녀 모습으로 화폭에 즐겨 담았는데, 일상에서도 아들들이 긴 머리채를 지니도록 고집했다고 한다. 소년 쟝이 도자기를 제작하는 모습을 담은 화폭과 더불어 도자공예품들도 나란히 전시된다. 쟝 르누아르는 영화제작자가 되기 이전에 도예가로서 예술계에 입문했다.
이외에도 당대 여성의상들, 각종 가족사진과 자료사진, 데생, 영상 등을 통하여 이례적으로 두 예술계에서 나란히 거장이 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생전 5천여점의 그림을 남겼던 화가 르누아르는 이 가운데 2천여점이 여성 인물화였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을 많이 그린 화가였다.
쟝 르누아르는 인상파화가처럼 화가가 사랑했던 여성미와 자연스럽게 빛을 발산하는 전원풍경의 아름다움까지 르누아르의 화폭 같은 영상미를 살려냈다는 평가이다.
두 아티스트는 섬세한 감수성으로 부드럽고 관능적인 여성미를 화폭과 영상에 각각 담아냈다. 이들은 여성미에 같은 감각적인 취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동일한 대상을 사랑했다. 르누아르 부자를 잇는 모태의 중심에는 바로 화가 아버지의 모델들이 자리잡고 있다. 쟝 르누아르의 모친도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모델 출신인 알린 샤리고 (1859-1915년)이고, 그 역시 아버지처럼 화가 르누아르의 마지막 모델이자 두 부자의 뮤즈였던, 당시 미술계에서 데데 (Dédée)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카트린 에슬링 (본명: 앙드레 에슬링, 1900-1979년)과 부친이 사망한 직후에 결혼했다.


▶여배우 카트린 에슬링이 데데 (Dédée)로 불렸던 모델 시절, 르누아르가 그린 ‘장미를 꽂은 금발소녀 (Blonde à la rose, 1917년)’ 



남프랑스 니스 근처 카뉴-쉬르-메르의 화가 르누아르 저택에서 데데는 15세부터 노장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바로 ‘장미를 꽂은 금발소녀 (Blonde à la rose, 1917년)’의 모델이다. 
이 영화제작자 쟝 르누아르가 첫 눈에 반해 도자기를 버리고 영화에 입문하게된 계기였던 에슬링은 그의 초기 무성영화들 5편에 출연했고, 의 아버지의 친구인 에밀 졸라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 '나나 (Nana,1926년)'를 통해 에슬링은 ‘프랑스의 그레타 가르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에슬링은 쟝 르누아르와의 결혼생활 11년만에 남편과 별거한 이후 차츰 은막에서 멀어졌고, 1943년 뒤늦게 정식 이혼했다.

한편 르누아르 부자는 각자 회화와 영화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최고 명예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Légion d’honneur)'를 1900년과 1975년에 각각 수여받았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